주경야역(晝耕夜譯)

readITzine 3호 기고문

주경야역(晝耕夜譯). 올 한 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쟁기 대신 랩탑과 마우스를 들고 밭 대신 프로젝트를 갈며 밤에는 열심히 번역하여 책 두 권을 썼다. 처음에는 심히 낯설기만 했던 이 이중 생활도 어느덧 7년, 처와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던 감정도 점점 무뎌지는 내 모습을 보니 이제는 어엿한(?) 과장급 역자가 된 듯하다. 그 동안 쓴 역서들을 포개어 쌓아보니 제법 높다랗다.

뭘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내가 무슨 대단한 능력이라도 갖고 있어 책 번역을 하는 줄 알지만, 나는 주로 대기업 SI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지극히 평범한 40대 후반의 개발자다. 암흑의 쉘 화면에서 춤추는 서버 로그를 보며 이와 비슷한 톤의 다크 테마가 설정된 IDE에서 바지런히 자바 코드를 만지작거리는, 우리 큰 딸아이 말마따나 “대단히 따분한 일을 하는 듯이 보이는(물론, 일 자체는 따분하지 않은)” 일개 엔지니어다.

내가 번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역설적으로 따분해 보이는 일을 하고 있는 내 영혼의 진부함을 달래려는 의도였지만, 코드를 만들어 내고 각종 서버를 세팅하는 일 외에도 내가 보람을 느낄 만한 일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유명 오픈 소스의 커미터가 되어 전 세계 수많은 개발자들에게 내가 만든 코드를 선보이고픈 욕심도 있었고, 또 나만의 경험과 노하우를 담아 스테디셀러가 될 만한 IT 도서를 집필하고 싶었다. 하지만 들쭉날쭉한 프로젝트 일정과 불규칙한 근무 강도, 그리고 마흔 이후 얻게 된 지병 때문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도 초심자 시절의 오래된 꿈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지만, 해외 유명 고수들이 쓴 원서를 국내 독자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역자로서 나는 큰 보람을 느낀다. 특히, 가끔씩 내 이름 석자가 등장하는 책을 읽고 개인 이메일이나 인터넷 서점 댓글로 몇몇 독자분들이 격려의 인삿말을 남겨주실 때 큰 힘을 얻는다. (발번역이라는 악평도 나를 더 분발하게 만드는 힘이 되니 나쁠 게 없다)

이제는 머리 구석구석 백발이 꽃피고 책을 오래 볼 수는 노안까지 찾아와 이 좋아하는 일을 내가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서지만, 솔직히 나이는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저 int 타입의 데이터일 뿐인 것 같다. 증가하는 걸 막을 도리는 없지만 그 하나의 멤버 변숫값이 내 인생 클래스를 좌우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내 주변을 보면 젊음을 늙게 사는 사람들이 있고, 늙음을 젊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좋아하는 일을 그만둘 이유가 없다.

이미 옛 성현들이 너무나 많이 말씀하신 까닭에 식상하고 진부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변화를 감수하고 도전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다. 내 경우만 하더라도 그렇다. 하루하루 매시각 어디로 불똥이 튈지 모를 SI 개발 프로젝트의 카오스성(chaosity)에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살아가는 내가 과연 이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또 해낼 수 있을까, 처음에는 숱한 고민을 했지만 그냥 밀어붙여 해보니 다 길이 열리고… 적어도 내 아이들에게 물려줄 소박한 유산 정도는 마련된 것 같아, 그리고 드물게는 나를 알아보고 역서에 사인을 해달라는 사람도 있어 뿌듯함을 느낀다.

굳이 책을 집필하거나 번역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중에도 늘 마음 속에 품고는 살지만 막상 실천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이런 분들에게 나는 간단히 영어 세 단어를 조언하고 싶다. “Just do it!” 다음 생애 같은 건 없고 지금 하지 않으면 영영 묻혀버린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실로 이 세상에 시작하기에 늦은 일 따위는 없다.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살아야 나중에 후회가 없지 않겠는가!

다가오는 2022년은 나를 포함해 이 땅의 모든 개발자 여러분들이 새로운 목표를 향해 첫삽을 뜨게 된, 의미있는 멋진 한 해로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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