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이름: architeer

프리랜서에 관하여

나는 20년+ 동안 IT 업계에 개발자, 엔지니어, 아키텍트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물론, 지금도 현역이다.

요즘은 유명한 아나운서들이 퇴사 후 프리랜서 선언을 하는 경우도 많고 MZ 세대 중심으로 노동 형태에 대한 사고의 틀이 많이 달라진 덕분에 프리랜서(영어는 freelance)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추세지만, 내가 처음 프리랜서를 선언한 2006년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달리 사람들의 편견이 상당했다. 속된 말로 어딘가 구린 데가 있어 소속되고 싶지 않아 하고 인간 관계를 맺는 행위 자체를 극도로 기피하는 사회 부적응자들이나 프리랜서를 하는 거라는, 겉으로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직원들끼리는 그런 뉘앙스로 수근대던 시대였다. 게다가 학벌이나 스펙상으로 전혀 하자가 없던 내가 프리랜서라고 하니 더욱 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있었고, 프로젝트에 처음 참여하게 돼서 익숙지 않아 조그마한 실수라도 하면 “저래서 프리랜서 하는군!” 하는 투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마디로, 내가 큰 뜻을 품고 선택한 길임에도 마치 내 등에 ‘프리랜서’라는 거대한 낙인이 찍혀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듯했다.

면접을 볼 때는 (대개 셋 중에 가운데 앉은 면접관이) 으례 가장 첫 질문이, “프리랜서 경력이 많으신데, 왜 프리랜서를 하시나요?” 였다. 그렇다, 질문 자체에 이미 편견이 내재되어 있고, 이미 정해진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인 것이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이라도 대답은 해야 하는 게 구직자의 숙명이니, “나의 프로페션(profession)에 집중하고 다양한 분야의 현장 경험을 쌓기 위해 프리랜서를 택했다”는 식으로 소신을 밝혀도 대개 고개를 갸우뚱하며 살짝 비웃는 모습을 보인다. 내가 아무리 뭐라 잘 설명해도 이미 그들의 눈에 나는 울타리를 뛰쳐나간 반항아(?)이자, 정상 궤도를 이탈한 불량품(?)인 것이었다.

하지만, 강산이 두 번 바뀌고 세상은 변했다. 이제 ‘종신 고용’을 보장하는 회사도 없고 그런 말을 믿는 순진한 사람도 없다. AI 시대가 펼쳐지면서 당장 개발자라는 직업이 존속할지도 솔직히 의문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에서 AI에 대체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AI보다 낫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70 ~ 80년대 산업화 시절의 낡은 틀에 갇힌,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팀장, 임원급 인사들이 있지만, 결국 그들도 살아남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지출품의서 결재받느라, 월별 실적/계획 보고하느라, 사내 정치하느라 에너지를 빼앗기는 정규직 직원들보다 차라리 묵묵히 기술 한 우물을 파내려간 프리랜서가 더 유리하지 않을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20 ~ 30대 젊은이라면 내 말을 귀담아 듣기 바란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자신의 목표가 정규 직원이든, 프리랜서든, 아니면 자영업자 사장님이든 간에 정신 바짝 차리고 치열하게 살다보면 서서히 길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고용 형태가 어떻고, 조직에서의 포지션이 뭐든지 상관없이 당신이 정말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당신에게 어울리는 위치로 가게 된다. 오해는 마시길! 나는 내가 오랫동안 프리랜서로 일해왔다고 해서 프리랜서가 최고다, 정규직 뭣도 아니다, 하는 말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또한 프리랜서라고 해서 다 같은 프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고용 형태만으로 다른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려 하지 말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절대로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어떤 길이든 막대한 기회비용은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 선택에 대해 20 ~ 30년 뒤에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그만이다.

2012년, 미국에 출장을 가서 프로젝트를 할 때 만났던 현지 영주권자 한국인이 했던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미국서 사는 한국분들 무슨 안 좋은 일만 생기면 자기가 시민권자, 영주권자 아니라서 그런 거라고들 하는데, 나는 영주권 나오기 전에도 백인 시민권자 고용해서 IT 사업을 했었거든요. 다 핑계죠, 핑계.” 나 역시 지금까지 프리랜서지만 대기업 직원들 상대로 개발자 실무 교육하면서 테크 리딩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매번 느끼는 바이지만 결국 누가 조직을 이끌고 갈 것인가는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는 꼬리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면서 기술을 잘 이해하고 사용할 능력이 있느냐로 결정됐던 것 같다. 명문대 출신이 아니어서, 나이가 너무 많아서, 정규직이 아니라서… 핑계거리는 무궁무진하다. 그 뒤에 숨지 말고 가만히 있어도 향기가 나서 사람들이 애써 찾는 귀한 꽃이 되기 바란다!

나의 가족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우리는 각자 이정표를 찾으려 고군분투한다. 나 역시 젊은 날에는 성공, 명예, 혹은 남들에게 보여지는 성취가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지만, 치열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내 삶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여느 가장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두 딸과 아내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의미다.

두 딸아이의 아빠가 된다는 것은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그 조그마한 신생아들이 어느덧 다 커서 조잘조잘 말을 하기 시작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뭉클함이 밀려온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운 음악보다 강력해서, 프로젝트 하다 쌓인 모든 피로와 스트레스를 단숨에 날려버린다.

가끔은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 하하, 나의 부질없는 이기적인 욕심이겠지만… 언젠가 아이들이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각자의 인생을 꾸려 가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뒤를 돌아보면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는 아빠가 있음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내 생애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이 아름다운 가족을 이룬 것이며, 남은 인생의 목표 또한 오직 하나, 이들의 행복을 지켜내는 것이다. 내 삶의 시작이자 끝, 그리고 전부인 나의 가족에게 깊은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투표사무원 후기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처와 함께 투표사무원으로 근무했다.

장소는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다른 동네 중학교였다. 새벽 5시까지 가느라 4시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고, 도착해보니 투표관리관 한 분과 다른 공무원 투표사무원 분들이 열심히 바닥에 청테이프를 붙이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4시 반쯤 도착했는데,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 지나 14명 사무원이 다 합류하자 선서를 한 후 유권자들을 받을 준비를 시작했다. 밖에는 그 이른 시간부터 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서는 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투표사무원 업무는 신분 확인하는 사람 4명, 투표용지를 나눠주는 사람 4명, 투표함 2개 뒤에 앉아 있는 2명, 안내원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투표사무원 경험이 없다고 안내원을 시켰는데, 관리관이 그냥 적당히 서로 바꿔가며 하라는 약간 무책임한 말을 하여 처음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앉아서 일하는 사람이 서서 일하는 사람과 흔쾌히 역할을 바꿔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공무원들 특유의 ‘신경쓰기 싫어하는’ 나쁜 버릇은 아직이구나, 싶었다. 12시간 남짓 일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적어도 업무 교대는 선거일 하루를 책임지는 자신들이 관장해야 마땅하지 않나.

다행히, 사무원들 개개인이 그리 몰상식한 사람은 없어서 그럭저럭 서로 자리를 바꿔가면서 즐겁게(?) 일했다. 우리 투표소만 약 1,600명 주민들이 방문했는데, 장시간 서서 안내하느라 때로 무릎이 시큰거리고 시간이 멈춘 듯했지만 버틸 만했다. 쉬는 시간이 따로 없어서 그때그때 서로 위치를 교대하며 화장실도 다녀오고 잠깐 밖에서 쉬기도 했다. 점심은 한솥도시락을 사갖고 와 처와 함께 차 안에서 허겁지겁 먹었는데, 일당에 식비는 별도라 불만은 없었지만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상황이니 식사를 각자 해결하라고 하는 것보다 단체로 김밥 + 음료수를 주문해서 나눠주는 게 더 낫지 않나 싶다.

이러구러 무사히 오후 6시가 되었고, 마지막 투표한 아줌마 한 분이 나가자 출입문을 봉쇄했다. 그리고 관리관이 투표 종료를 선언 후 참관인들과 함께 투표함 봉인을 하고 있는 동안, 14명의 사무원들이 일사분란하게 뒷정리를 마치니 6시 15분 정도 되었다. 모두 웃는 표정으로 다음 투표를 기약하며 굿바이했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이었지만 단순히 일용직 알바를 했다는 생각보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를 위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뭔가 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참 잘도 돌아다녔네

30대에 갓 접어들 무렵, 겁도 없이 혼자서 도요타 코롤라 한 대를 끌고 미국 본토를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던 경험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로 기억된다.

4,000마일이 넘는 이 장대한 여정은 2년 동안 여러 차례 나누어 진행했는데, 당시 내가 머물렀던 조지아 주 애틀랜타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1. 서부 여행(녹색) : 밴쿠버(캐나다) ~ 시애틀 ~ 포틀랜드 ~ 몬터레이 ~ 샌프란시스코 ~ 로스앤젤레스 ~ 샌디에고
  2. 동부 여행(보라색) : 보스턴 ~ 필라델피아 ~ 뉴욕 ~ 워싱턴 D.C ~ 리치몬드
  3. 횡단 여행(빨간색) : 뉴올리언스 ~ 샌안토니오 ~ 라스베이거스 ~ 솔트레이크시티 ~ 덴버 ~ 캔자스시티 ~ 세인트루이스 ~ 메인 ~ 버지니아 주
  4. 플로리다 여행(풀색) : 올랜도 ~ 마이애미 ~ 키웨스트
  5. 기타 : 시카고, 하와이, 서배너, 찰스턴, 테네시, 토론토(캐나다), 댈러스

이 정도면 내 발길이 닿지 않은 알래스카, 괌 등지를 제외한 웬만한 미국 주요 도시들은 다 가본 셈이고, 아마 대부분의 미국인들보다도 미국 본토를 더 돌아다녔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특히, U.S. Route 101을 따라 주구장창 남으로 달리면서 끝도 없이 펼쳐진 드넓은 태평양 거친 파도를 바라볼 때의 감격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벅차오른다.

하루 5 ~ 10시간 운전하며 싸구려 모텔에서 쓰러지듯 기절하고… 하하,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구나, 싶다. 누군가 지금 나에게 같은 짓을 하라고 한다면, 설령 비용을 다 대주겠다고 해도 도저히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군대 추억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나 군대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너무나 진부한 얘기임에도 남자들끼리 모이면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이야기 보따리^^

나는 공군 사관후보생 100기로 임관하여 40개월 동안 복무했다. 내 나이 24, 25, 26, 27살… 꽃다운(?) 시절의 40개월을 공군에 몸담았다.

2001년 7월에 전역한 후 별로 꺼내볼 일이 없어 묻어두었던 사진이 몇 장 발견되어 모처럼 오래 전 추억에 빠져본다.


진주 훈련소 시절이다. 무더운 남쪽에서 16주 동안 고된 훈련을 받았다. 특기 교육까지 합하면 반년 동안을 진주에서 살았다.


드디어 공군 소위로 임관하고 부모님을 뵙던 날! 계급장을 달아주시던 아버지의 흐뭇한 미소가 아직도 생각난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힘들었던 기억도 지나고 나면 흐뭇한 추억이 된다.
나보다 늦게 입대해 행정계에서 신병 대기하다 먼저 제대한 친구들도 지금쯤 어딘가에서 다 중요한 사람들이 되어 있겠지? ^^


열악한 BOQ 비좁은 숙소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며 의리없게(?) 먼저 전역한 선배 장교들, 어리버리한 초급 장교에게 따뜻하고 살값게 대해주셨던 삼촌뻘 부사관 아재들도 은퇴 후 건강히 잘 계신지…

당시엔 너무너무 더디게 흘러가던 시간들이 지금 와서 돌아보니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태어난 곳이 휴전 상태인 국가라 어쩔 수 없이 다른 남자들처럼 나도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바쳐야 했지만, 대한민국 공군 장교로 복무했다는 사실은 지금도 나에겐 큰 영광이자 자랑이다.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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